온혜리 농사꾼 장학금 할아버지
상태바
온혜리 농사꾼 장학금 할아버지
  • 오경숙 기자
  • 승인 2013.02.27 18: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박한 은빛사랑 오래 이어졌으면…

 

농촌에서 청소년들에게 장학금을 주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인데 어떠한 계기가 있었는지요?

 

부모한테 물려받은 재산 없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농사일만 했죠. 농촌에서 식구들을 굶기지는 않겠지 하면서 열심히 했으나, 오남매 교육시키는 일이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학비를 낼 때가 다가오면 자연스럽게 빚을 지게 되었죠. 큰딸은 안동여고를 나와 대학을 가려했으나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학비를 마련할 수가 없어 대학을 못 보내 가슴에 두고두고 못이 박혔습니다.

큰아들 또한 안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편이 어렵다보니 스스로 경찰이 되겠다며, 경찰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떡하니 합격을 했으나 그것도 잠시, 스물여섯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지고 먼저 갔습니다.

할머니는 정신을 놓은 채 멍하니 하늘을 쳐다보고 제 정신이 아니었지요. 애들이 제 엄마를 붙잡고 우리도 자식이다며 울고 불고……시간이 지나니깐 어찌 또 그렇게 살아집디다. 그렇게 맺힌 한이 지금의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자식들 학비를 마련하려고 동네 이웃들이나 친지들에게 손을 내밀어 돈을 빌려 보려고도 했지요. 하지만 그 돈을 못 갚게 돼버리면 서로 마음의 상처만 입게 되겠다는 생각에 결국에는 대학을 포기하는 수 밖에 없더라고요. 그 당시는 절실한 심정으로 누가 학비만 도와줬어도 하는 마음이 간절했거든요.

농사 지으면서 그리 넉넉하지는 않았을 뿐더러 현재 몸도 편찮으시다는데 장학금 주는 일을 계속 하실 의향이신가요?

두 내외 삼천 평 조금 넘게 농사를 짓고 있어요. 생활비를 제외하고 농사 짓는 데 들어가는 비용, 농자금 이자 제하고 나면 1년 농사에 남는 게 그리 많지는 않아요. 윗대 어른들이 살던 곳은 지금은 물에 잠기고 없는 월곡인데, 그 때 자리를 옮겨와 이곳 온혜에 자리를 잡고 담배농사를 시작한 게 오늘날까지 농사를 짓게 되었죠.

다들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라 가정형편 때문에 학교 공부를 더 못한 것이 한이 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고향땅을 등지고 도시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은 엄두도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집안의 장남이었고 부모님의 농사일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해왔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담배농사를 지었는데 예안에 있는 담배 수납창고까지 수납하고 돈 찾으러 갔는데, 글쎄 빚쟁이가 먼저 와서 돈을 한 푼도 안 남기고 다 갖고 가버렸죠.

그러다 나중에 담배 농사도 다 말아먹고 64년도 정부에서 사과 농사를 권장하게 되어 20년 가까이 과수 농사를 했죠. 물론 사과값이 좋아 수확을 거둬들인 해도 있지만 전국적으로 너도나도 사과농사를 짓는 바람에 결국에는 사과나무를 다 뽑아냈거든요. 그렇다가 한창 고추농사를 권장해서 고추농사를 크게 하기도 했으나 그것도 너도나도 고추농사를 지으니깐 고추파동이 일어난 데다가 수입까지 해대니 살아날 길이 없었어요.

지금은 수박농사를 지으면서 큰 수확을 올리기도 하고 값이 폭락해 적자를 보기도 하지요. 몇 해 전에는 이것저것 다 제하고 나니 달랑 400만원이 남더라고요. 이걸로 장학금을 주는데 할머니 눈치도 보이고……그래도 이제는 살짝 뒤돌아서 잔소리 할 뿐 포기하고 말죠. 몇 년 전부터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해 무릎 수술을 했는데 퇴행성관절염이라 그럽디다. 덕분에 할머니 일이 더 많아진 셈이죠, 그래도 장학금 주는 일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내가 움직이는 동안은 계속 하고 싶네요.
 

할머니나 자녀분들은 할아버지 하시는 일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요?

 

자식들이 부모 힘들어 하는 거 좋아할 리 있나요. 자꾸 쉬라고 하지만 본인들도 형편이 어려워 제때에 학업을 제대로 못한 게 한이 되어서인지 한편으로는 무언의 긍정을 하기도 합니다. 항상 자식들한테 미안할 따름이죠.

도산 온혜 노인정에서도 이제는 다 같이 폐품 등을 모아 다른 노인정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는데요.

2008년부터 ‘온빛사랑’이라는 슬로건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유휴지에 배추랑 무, 고추 등을 재배해 어려운 세대에 전달하고 있습니다.

또한 틈틈이 짬을 내어 폐지와 고철 등을 수집해 기금을 마련해 도산 출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준비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주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혼자 고철과 폐지 등을 모아 장학금에 보탰는데 이제는 도산 온혜3리 노인회가 합심이 되어 장학 사업 뿐만 아니라 관내 어려운 세대에까지 전달하고 있습니다.
 

강창규(74세) 할아버지는 2004년부터 매년 안동고등학교와 안동여고 졸업생들에게 대학입학자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라며, 첫해에는 500만원을 가지고 250만원씩 두 학교에 나누어 주었다. 농사가 잘 되어 수확이 많을 때는 학생들에게 혜택을 더 주었으며, 농사가 시원찮을 때는 어쩔 수 없이 학생들에게 장학금 액수가 줄어들 수 밖에 없어 안타까워 했다.

현재까지 20여 명에게 약 3천만원 가량의 장학금 혜택을 주었다. 강 할아버지는 농사가 시원찮을 때는 제일 먼저 장학금을 줄 수 없게 될까봐 일단 수입이 생기는 대로 작은 돈이라도 장학금 통장을 따로 만들어 돈을 넣어 버린다.

그렇게 장학금을 전달 받은 학생들과는 매년 연말이면 식사를 같이 하는 자리를 갖기도 한다며, “어려운 학생들이 형편에 잘 맞추어 열심히 대학생활 하는 것을 보면 너무나 대견스럽다”며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강 할아버지의 고철과 폐지 줍기가 도산면 온혜3리 노인회로 전파된 지금은 처음 시작한 ‘은빛사랑’ 봉사활동이 배추 200포기를 기증하고 고추, 양념 등을 분담해 매년 김치 20kg, 30박스를 노인회시지회를 통해 어려운 세대에 전달하고 있다.

또 2011년부터는 장학금 사업을 추가 사업으로 시작했다. 그 동안 재활용품을 모아 판매한 수익금으로 관내 청소년 각 30만원씩 2명에게 전달했으며, 2012년도에는 고철 폐지 수익금이 50만원이다 보니 청소년 2명에게 각 25만원씩만 전달했다. 이러한 일들이 주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경로당에서 할 일이 생기면 먼저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여 타 지역에 귀감이 되고 있다.

강 할아버지는 “평생을 농부로 살면서 제대로 배우고 알지는 못하지만 앞으로 이 시대를 짊어질고 갈 청소년들이 올바른 사고방식을 갖고 어떠한 역경에도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반드시 길은 있다”며 희망을 가지라고 말했다. 또, “우리 어른들이 나 자신을 생각하기 전에 주위를 한 번씩 돌아볼 줄만 안다면 우리나라 청소년 문제가 이러쿵저러쿵 큰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라며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