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근대’에 대한 관심, 애정이 절실하다...양 지역, 연계와 협력·교류·상생을 위한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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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지역 근대’에 대한 관심, 애정이 절실하다...양 지역, 연계와 협력·교류·상생을 위한 프롤로그
  • 권기상 기자
  • 승인 2020.07.2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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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청년기자연합 기획연재] 안동·예천 교류와 상생의 근대기행 (1)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안동·예천이라는 땅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현재라는 시간대 위의 우리들 삶을 기준으로 볼 때 가장 근접해 살다가 간 근대 전후 시기의 지역(地域) 할아버지·할머니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하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또한 안동·예천지역에게 소위 근대(近代)라는 ‘괴물’은 어떤 모습으로 다가왔을까? 경상북도 북부권에 위치한 안동·예천 백성들의 눈에 비친 괴물의 모습은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굳이 괴물이라고 지칭한다고 해서 어떤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니다. 이에 처음부터 나쁜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만 지구상에서 어떤 시대적 전환기를 맞아 우선적으로 새로운 문명과 힘을 획득한 제국들이 상대적으로 폐쇄되고 심약한 지역으로 거침없이 밀려올 땐 대개 ‘기존질서의 파괴와 부정’을 수반하기 때문에 공포의 색채를 짙게 띠게 마련이다.

▲ 안동부. (사진제공. 경상도칠백년사)

 

▲ 예천부. (사진제공. 경상도칠백년사)

지금으로부터 약 120여 년 전후에 들이닥친 근대라는 시대적 조류와 파고가 조선제국의 멸망을 이끌어 내었고, 그에 나름대로 적극 대응했지만 한반도 백성들의 삶에 파탄을 일으켰다는 점, 그리고 곧바로 외세의 식민통치라는 억압과 지배를 받았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비쳐질 수도 있었다는 생각에서다.

대개 근대에 대한 입장은 흑(黑)과 백(白)의 색깔로 다가오기 쉬울 것이다. 흑색은 일본의 식민지 경험 속에서 나타나는 ‘억압과 지배’의 관점이 주를 이루고, 백색은 서구사회의 ‘모방과 선망’이 일정부분 현실화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생활의 영역에서 선택되어질 것이다. 당장은 지역에서 완벽한 학술적 논증이나 구명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할 수 있는 역량이 조금 부족해 보일 수 있다.

이에 기존 연구를 참조하거나 현장 답사와 취재를 통해 파편들을 찾아내고 얼기설기 엮어 들어가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일종의 근대 풍경을 기록과 기억에 의존하며 더듬어 내는 방식의 여행을 테마 중심으로 엮어 나갈 것이다. 동시에 안동과 예천, 양 지역의 연계와 교류, 협력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나가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며 자명하다. 8년 전인 2008년 6월, 경북도청의 공동유치를 성공시켰기 때문이다. 공동유치라는 원인이 있었고, 그 결과로 2016년 봄, 경북 신도청은 이전을 마무리 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양 지역을 포함한 경북북부권이 오랜 세월 염원했던 상생 발전의 기틀과 계기를 조금이나마 그 단초를 마련했다는 사실에서부터 양 지역은 필연적인 운명·상생공동체로 묶이고 있다.

‘우리나라, 우리땅, 우리지역’에 대한 애정 절실하다

▲ 내성천. (사진제공. 강병두)

한반도에서 지리적 환경으로 보면 경상북도는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동해, 낙동강이라는 산하(山河)에 위치해 있다.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이중환은《택리지》에서 “살 곳을 정할 때는 지리(땅, 산, 강)를 먼저 살펴야 한다. 지리를 볼 때는 먼저 수구(水口)를, 다음은 들의 모양을 보고, 산의 모양과 흙의 빛깔을 보고, 마지막으로 조산(朝山)과 조수(朝水)를 본다”고 했다.

이에 따라 이중환은《택리지》를 통해 경북북부권에 대해 “예안·안동·순흥·영천·예천 등의 고을은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다. 태백산 밑은 산이 평평하고 들이 넓어 명랑하고 수려하며, 흰 모래와 단단한 토질로 기색이 완연히 한양과 같다. 서로 가까운 다섯 고을에 사대부가 가장 많으며, 모두 퇴계와 서애 문하생의 자손들이다. 의리를 밝히고 도학을 중히 여겨, 비록 외딴 마을, 쇠잔한 동리라도 문득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며, 해진 옷을 입고 항아리 창을 한 집에 살아도 모두 도덕과 성명(性命)을 말한다”고 찬가를 불렀다. 다섯 고을 중 ‘영천’은 영주의 옛 지명이다.

즉, 지리가 아름다운 곳이며 인재의 보고(寶庫)라 했다. 안동부 관아 북쪽 200리 태백산 밑의 내성·춘양·소천·재산 등 네 마을은 병란과 세상을 피해 살 만한 곳이며, 그 동쪽인 영양·진보 두 고을도 풍속이 대략 비슷하다고 설명했다.

근대 시기를 넘어 근·현대라 일컫는 작금의 시점에서 바라보아도 이쪽 골짜기 저쪽 강변에 옹기종기 군락을 이뤄 살아가는 데에 그리 썩 나쁜 편은 아니다. 산과 강, 들을 들여다보면,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설명했듯 ‘병란과 세상을 피해 살 수도 있는 곳’은 분명한 것 같다. 다만 ‘신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라고 자랑하기에는 조금 인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시간을 갖는다면 이 지역은 가히 찬양할 만한 지세로 형성돼 있다.

젊은 시절 한두 번 쯤 ‘국토애’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80년대 사회문화적 힘의 억압과 왜곡, 정치의 폭정에 대한 반항심이 흘러 넘쳐 온통 급진적 관념에 젖어 들던 시기에 ‘우리 땅, 우리 산하에 대해 넌 도대체 무얼 알고 있느냐’는 물음표에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허리 잘린 국토의 분단 고착과 함께 독점자본의 굴레에 신음하며 뒤틀려지고 있는 당대의 사회에 대해 분노를 일삼던 1986년 스물한 살 앳된 청년을 향해 누군가 ‘지금 두 다리를 딛고 서 있는 이 땅에 대해 너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답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우리 땅, 우리 선조들의 삶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다 라고 답변하지 못했었다.

▲ 내성천의 노을과 학가산. (사진제공. 강병두)

‘학가산은 세 고을(예천,안동,영주)을 드리운다’

대개 지리(地理)라고 말하고 배우며 말해왔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쉽게 땅이라고 하면 될 일이다. 땅에는 길이 있는 법이고, 땅 위에는 유구한 산과 강이 먼저 존재했었다. 조선 중기 학자인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이 저술한《산경표(山經表)》에 따르면 우리나라 산세를 대간(大幹) 하나와 정간(正幹) 하나, 그리고 13개의 정맥(正脈)으로 나누고 있다. 우리 땅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는 산줄기인 백두대간이 사람의 허리뼈에 해당한다면, 백두대간에서 나뉘어진 정맥 즉 큰 산줄기를 따라 강과 천이 흘러내린다.

백두대간은 태백산에서 동해를 따라 새로운 산줄기를 만들고 있는데 이 산줄기가 낙동정맥이다. 낙동정맥은 소백산 북동부에 자리 잡은 옥돌봉에서 곁가지를 친 문수지맥의 문수산을 낳고, 학가산을 세우게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학가산(鶴駕山, 882m)에 주목해야 한다. 백두대간의 죽령을 넘으면 남쪽 벌판에 우뚝 솟은 산인데 소백산을 마주 보고 섰다고 보면 된다. 문수지맥의 한 가운데 봉화 옥돌봉에서 분지하여 예천 용궁의 회룡포를 지나 삼강에서 낙동강에 닿게 되는데 도상거리가 114.5km의 산줄기다. 학가산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200리 밖 부석사가 가물거리고, 동으로는 청량산이다. 서쪽엔 예천읍이 한눈에 들어오며 남쪽으로는 낙동강이 안동시가지를 감싸며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뒤쪽으로는 내성천이 우리나라 최고라고 평가받는 흰모래를 보듬으며 흘러 가고 있다.

27여 년을 학가산에 대해 연구해 온 장두강은 2010년《학가산》을 발간하며 이 산에 대해 “문수지맥 가운데 가장 우뚝한 산으로 숲과 바위가 잘 어우러진 조화로운 산이다”고 극찬했다. 학가산에는 사람과 종교와 생업과 문학이 함께 하였던 산을 넘어서서, ‘학가산은 세 고을에 드리운다’(鶴駕山影照三郡)는 안동 팔경 중 제5경 학가귀운(鶴駕歸雲) 을 강조했다. 학가산이 안동지역의 듬직한 배산이고 주민들이 정신적인 진산으로 여기고 있는 것처럼, 예천지역에서는 일출을 맞이하는 해 뜨는 동산으로 노래를 불러주었다. 이렇듯 학가산 8개 봉우리에 깃들어 살아온 안동·예천사람들의 삶과 문화를 찾아가야 할 것이다.

또한 이중환의《택리지》에서 언급한 ‘태백산 밑’을 주목할 수 있다. “태백산 밑은 산이 평평하고 들이 넓어 명랑하고 수려하며, 흰 모래와 단단한 토질로 기색이 완연히 한양과 같다”고 했다. 이를 요즘 말로 풀어보면, ‘태백산 아래쪽으로는 평평한 산에 넓은 들이 있다. 풍경은 밝고 맑다. 흰 모래가 많고 토질이 단단해 그 기색이 한양과 닮았다’는 것이다.

한양에 흰 모래가 많았듯 낙동강 또한 모래가 천지처럼 펼쳐져 있었다는 걸 뜻한다. 모래를 산출하는 암석군이 산과 들에 많이 두루두루 분포했다는 지질의 특성 때문에 낙동강 유역에는 흰 모래가 산더미같은 지형을 쌓았다는 설명이다.

또한 낙동강은 백두대간, 낙동정맥, 낙남정맥의 안쪽을 흐르는 강이다. 황지에서부터 안동까지가 600리이고, 안동에서 부산까지가 700리로 총 길이는 1300리 이다. 그렇다면 낙동정맥과 문수지맥의 산에는 숲이 우거졌고, 그 산을 끼고 밑으로 낙동강과 내성천이 흘렀고, 강과 강변에는 흰 모래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그 강물은 봉화와 영주, 예천과 안동의 생명을 낳고 살찌우며 문화를 풍성하게 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맑고 밝은 풍경 위에서’ 의리를 밝히고 도학을 중히 여기며, 세상사의 이치를 깨달으며 살았다는 점에서 문득 대략적으로나마 지리가 지역주민의 정체성으로 번져 나갔을 것이라고 깨닫게 된다.

이에 솟아 오른 학가산과 내성천, 낙동강이 흘러가는 시·군 경계의 행정 면(面)과 마을에 오롯하게 잠들어 있는 삶과 이야기를 찾아갈 것이다.

▲ 지게꾼과 아이들. (사진제공. 사진으로 떠나는 근대기행, 부산근대역사관)
▲ 하류층 가족. (사진제공. 사진으로 떠나는 근대기행, 부산근대역사관)

양반의 나라, 상놈의 나라는 달랐고....
봉건왕조의 멸망, 백성의 삶은 고달팠다


지난해인 2015년은 을미년이었다. 딱 120년 전 을미년인 1895년을 역사의 한쪽에서는 ‘을미국상’ 이라고 부른다. 고종황제의 부인이자 한 나라의 어머니인 명성황후를 일본 낭인들이 무도하게 시해한 날이다. 그 전후시기에 지역에서도 반봉건의 기치를 든 동학전쟁이, 반외세의 깃발아래 갑오의병·을미의병이 드세게 일어났고 이슬처럼 사라져 갔다. 그렇게 육십갑자(六十甲子)를 두 바퀴나 돌고 돌아서 한반도의 백성들은 오늘의 갑자년(2016년)까지 도달해 있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통치를 받기 시작했지만, 조선의 후예인 식민지의 백성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대한독립을 염원하며 저항했으며, 자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투쟁했다. 1945년 잠시 해방의 함성이 울렸지만 나라는 두 조각으로 갈라졌고 분단과 전쟁, 더 강고한 분단국가로 고착화됐다.

하지만 왕조시대 치하에서 모든 백성들에게 삶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인 의식주가 골고루 분배되거나 혜택으로 돌아갔을 리는 없다. 골수까지 스며든 반상의 제도 아래에서 양반과 농민, 상놈의 하늘과 땅은 천당과 지옥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굴곡진 근대적 삶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며 한평생 안동 땅에서 글쓰기에 몰입한 1937년 생(生) 고(故) 권정생 작가는《한티재 하늘1》에서 을미년(1895년)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티재 너머로 난리가 밀려 온 건 섣달 스무날이었다. 지난해 동학난리를 거쳐 올 팔월에 을미국상을 당하고부터 삼남 지방 여기저기서 빤란구이(반란군-의병대)들이 갑자기 벌떼처럼 일어났다. 섣달에 들면서 한티재 너머에도 한 동네 두셋씩은 젊은이들이 집을 떠났다. 집에 금송아지 매어놓고도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데, 빤란구이들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한뎃잠을 자고 먹는 날보다 굶는 날이 더 많고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데, 그래도 젊은이들은 집을 떠났다. 왜 그러는지 분들네나 조석이 같은 백성들에겐 아무래도 모를 일이었다. 더욱이 그 빤란구이들과 관군 수비대들이 총포를 쏘아대며 이 산 저 산 골짜기 마을로 난리를 치고 다니며 몰려온다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이 때 조석이 아내 분들네는 혼자 중얼거린다. ‘난리를 친다꼬 시상이 숩게 뒤집어지나. 우리 긑은 힘없는 백성 단지 남의 논밭이라도 많이 얻어 알뜰살뜰 일해서 처자식 굶기지 않고 등따십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되는 게지 뭐. 청상과부 팔자 곤치는 것도 심드는데 무슨 심으로 감히 반란을 일구노.’

▲ 풍산들. (사진제공. 안동의 어제와 오늘, 안동시)

당시 농민들의 토지소유에 관한 자료는 없으나 이후인 1910년 ‘조선총독부통계연보’에 따르면, 1909년 안동(안동군·예안군) 농민의 인구수는 6만4천7백여 명 이었다. 1호당 평균 경지면적이 990평에 해당한 것으로 전반적으로 영세 농업·농민이었다. 1928년의 경우 한 마을에 무토지농민은 약 4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 대비해 보면 전체적으로도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렇게 소작지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은 대다수 농민의 생활이 절대 빈곤에 빠져 있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양반 지주는 큰 들판과 옥답을 움켜쥐고 떵떵거렸고 손바닥만한 땅 뙈기를 가진 농민과 무토지 농민은 도조를 내고 얻어 부치며 생존했다.

소설 속에서 조석과 분들네는, 붙잡힌 빤란구이 두 명이 마을사람들 눈앞에서 즉결 총살되는 학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두려움과 절망을 느끼면서도 사람들은 조그맣게나마 분노의 움을 가슴에 틔우게 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실감나게 그렸다.

소설을 넘어서서 당시 역사적 사실로서 가치가 상당히 있다고 믿게 된 것은 권정생 작가가 어머니에게 듣고, 1960년에서 1970년대 시절에 삼밭골 할배 할매들의 기억을 기록해 뒀다가 작품화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다.

이 소작농들은 수탈이 더욱 가혹해지는 가운데 1919년 3.1만세 운동을 거치며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한 젊은 지도자들과 결합하며 소작쟁의를 불러 일으켰고 이는 식민지 통치아래에서 새 사회를 위한 농민운동의 활로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안동과 예천, 영양·청송 등지의 가난하고 젊은 2세 농민들은 이후 개설되는 경북선과 중앙선 철길을 타고 북쪽 땅인 간도 등으로 이민행렬에 떠밀리어 지역을 영원히 떠나게 되었다.

동학과 의병항쟁, 지역 기반 허물어져
‘양반고을 안동의 존망이 의거에 달렸다’


역사적 기록을 보아도 당시 지역사회는 동학과 단발령, 유림의 의병활동으로 소란스러워져 있었다.

예천 용문 맛질 미산종택 함양박씨 6대에 걸쳐 쓰여 진 일기인『저상일월(渚上日月)』에서는 ‘안동·예천에 산재한 동학군 숫자가 약 3천 명에 이른다’고 했다. 또한 동학농민전쟁 당시 안동진 영장(營將)이었던 김호준의 기록인『영가기사(永嘉記事)』에는 안동의 동학농민군 활동이 상당했다고 동향을 밝히고 있다. 직곡(直谷)과 구미(九尾)에는 접소가 설치되어 있고, 풍산현 풍산·서선면 수동(壽洞)·일직 안망곡(安望谷)·운산(雲山)·서후 저전(苧田)·북후 옹천·감천현 등이 와굴이라고 했다. “부외(府外) 5리 정도의 4면이 모두 저들 무리가 만연해 점차 부중(府中)에 가까워지던 시기였다”고 전한다.

이에 1894년 8월 즈음에 영호루에서 창군을 점고하고, 연무정에 도총소를 설치했다. 『예천군척사록』에서는 “일읍(一邑)이 회의하여 작통(作統)하고 무기를 준비하고 약간의 조약을 만들어 예기치 못한 일에 대비하였다”고 한다.

도총소의 장정 천여 명이 안동 구미와 안망곡접소를 공격해 동학농민군은 의성경계에 집결했다가 예천 금당과 화지접에 합세한다. 이어 안동도총서는 예천 보수집강소의 요청과 상주 소모영의 지시에 따라 그쪽 지역에 군대를 파견했다. 이에 예천의 민보군과 농민군 사이에 안동도총소 소속 331명이 예천 금곡과 화지의 농민군을 공격해 패산시켰다고 한다. 붙잡힌 농민군에 대한 처형 방식은 ‘매장시켰다’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런 가운데 안동에서는 갑오의병에 이어 을미년 1895년 연말에 본격적인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10월에 발생한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2월 김홍집 내각에 의해 감행된 단발령에 대한 유림의 반발이 큰 계기로 작용했다고 한다. 봉정사 절에서 유림대표 40~50명이 거병을 결의했고 이튿날 1천여 명의 유림이 참석한 향회가 열렸다. 곧 1만 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석해 권세연을 의병장으로 선출했다. 안동부를 장악하자 관찰사 김석중은 예천으로 탈출했고 안동의병과 예천관군이 두 지역 접경지에서 전투를 벌였다.

『저상일월(渚上日月)』기록에서는 이 당시 상황에 대해 ‘충주 관찰사가 강제로 단발에 나서자 선비들과 백성들이 모두 문경새재를 넘어 도망쳤다. 안동 관찰사도 고을마다 공문을 보내 삭발하겠다고 통고하니 예천군수와 이방이 사표를 냈고, 하회마을 유(柳)교리도 삭발에 분노하여 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잇달아 거병하는 가운데 양반고을 안동의 존망이 의거(義擧)에 달려있다’고 시국을 걱정하고 있다.

▲ 예천 남산공원의 김순흠 기념비.

난세에 백성의 고난, 피난행렬로 이어져
살아남고 또는 죽어가는 망국의 풍경


이런 가운데 백성들의 피난행렬이 일어났다고 말하고 있다. 피난행렬이란 난세에 큰 난리가 발생하면 백성들은 참화를 피하기 위해 서둘러 마을을 떠나 산골짜기까지 피난줄을 길게 늘릴 수밖에 없는 참상을 나타내는 말이다. 눈 내리는 겨울, 피난길에 나선 아비·어미들은 큰 아이는 앞세우고 작은 아이들은 서로 손잡게 하고, 간난아이를 들쳐 업거나 솥과 이불을 이고 지고 걸어야 했다. 백성들의 고난의 행렬은 무너지고 뒤틀린 채 힘도 없고 정의조차 잃어버린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초이었는가를 감히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풍경으로 성큼 다가온다.

잔혹한 식민지 역사의 서막은 불쌍하게 살아온 조선과 그 후예인 백성들을 엎친데 덮친격으로 또다시 산으로 거리로 내몰았다. 그 아래에서 백성들은 질기게 살아가며 가족을 지키면서도 때때론 울분의 길을 나서기 마련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되는 역사 속에는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과 목숨 줄이 청천하늘의 잔별처럼 지고 떴을까? 감히 상상을 불허할 수도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봉건제도의 청산과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막아내 자기발전의 정상적인 길을 개척하지 못한 채 조선제국은 1910년 국망(國亡)의 길로 치달았다.

결국 나라는 망해 갔지만, 안동과 안동에 인연 맺은 사람들 10여 명이 자정(自靖) 순국으로 목숨을 끊었다. 이 가운데 국망 직전 안동 풍산 수동에서 태어난 김순흠(1840~1908)의 자정순국 과정이 안동·예천지역에 걸쳐져서 이루어지고 있다.

김순흠은 1894년에서부터 1896년 시기인 전기의병이 사그라지자 예천군 감천면 물한리로 이거했다. 을사조약(1905년)이 체결되자 5적의 매국행위를 규탄하는 <토오적문>을 전국 유림에 배포한다. 다시 1907년 의병에서는 군자금 조달을 했지만, 감천면 진평리 서무뜰로 돌아왔다. 1908년 “내가 죽거든 빈소를 차려 곡을 하기는 해도 상식(上食)은 하지마라. 왜놈 천하에서 자란 곡식을 먹을 수 없으니 국권이 회복되는 날 올리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단식 23일만인 9월28일 69세로 순국하게 된다.

▲ 1940년대 예천읍 전경 (사진제공. 사진으로 보는 예천50년사, 예천군)

전통마을 중심 사회가 면(面)단위로 강제통합
1914년 안동군, 예천군으로 기초행정 단위 출발


1900년을 전후로 식민통치 초기 시절의 안동·예천의 행정구역은 어떻게 변천되어 왔을까?《안동근현대사2》(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편) <행정>편에서는, 1894년 갑오경장 이후인 1895년 5월에 지방관제가 개혁되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종래의 8도제를 폐지하고 소지역주의를 채택해 전국을 23부로 나누고, △구제도에 의한 도 이하의 부·목·군·현을 폐합·개편해서 336군으로 통일했다. 곧 제2차 개혁을 단행해 23부제를 폐지하고 13도제를 취했고 하부행정구역으로는 부·목·군으로 구분했다.

이때 경상도는 대구부·안동부·진주부·동래부의 4부로 구역이 나누어졌다. 다시 개편이 시도되어 경상도는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로 분리된다. 경상북도는 41개의 행정구역(부·목·군·현)이 모두 부 예하의 군으로 정비되었다. 대구부 소속 20개군, 안동부 소속 16개군, 동래부 소속 4개군 등 이다. 그 후인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게 되었다.

1910년 8월29일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졌고 그해 9월30일 조선총독부관제와 지방관제가 발포되었다. 종래의 면(面) 제도에 본질적인 변화가 발생한 것이다. 종래의 면은 군·현과 동리의 중간기관에 불과했지만 그때부터는 면 제도가 기본행정단위로 정착되었다.

다시 1914년 조선총독부는 대대적인 지방제도 개혁을 단행한다. 식민지배의 효율적인 수행을 목적으로 지방행정의 일원화를 단행하게 되는데 그 기준을 군은 면적 약 40방리(호수 약 1천호), 면은 약 4방리(호수 약 8백호)를 기준으로 설정했다고 한다. 한반도 전역에 걸친 토지조사사업(1910~1917)으로 각 지방의 지형과 지세, 면적 등이 명확히 파악되자 일제강점 초기의 12개 부, 317개 군을 220개 군으로 감축하며 109개 군을 폐합시켰다.

대한제국 시절 안동에는 안동부와 예안부가 있었으나 1914년에 예안군이 안동군으로 통·폐합되었다. 또한 예천군은 용궁군을 병합하고 영주군의 상·하리면과 안동군의 감천면을 편입해 12개 면이 되었다. 이때의 군·면 개편이 오늘날의 지방행정 구역의 기틀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한 행정구역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렇게 1914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군면동리 통폐합이 실시됨으로써 동리 단위로 생활권이 형성되어 있는 전통적인 지방제도는 철폐되고, 면을 중심으로 생활권이 묶인 지역사회는 식민통치의 원활한 체제 속으로 급속히 재편되었다. 다시말해 기존 마을중심의 공동체적 자치제 요소가 사라지게 되고 식민통치의 효율적 지배를 위해 소지역 간에서도 이해관계에 따라 갈등이 조성돼 대립갈등이 심화되는 등 분할·분열정책과 구도라는 특성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사진제공. 안동학 제14집. 한국국학진흥원)

철도 위를 달린 시커먼 괴물 ‘경북선’

한편, 한국의 근대성은 바로 식민지의 근대성이라는 시대환경의 특성을 갖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개시는 곧 이전의 우리사회를 전근대 즉 야만으로 규정하며 새로운 문명의 등장을 예고하고 있었다. 사회구조 분포로 봤을 때 안동·예천지역은 읍내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산재한 수많은 농촌을 기반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큰 근대적 충격은 무엇으로 다가왔을까? ‘식민통치기구·신작로·신식건축물·기차·서양종교·신식교육....’ 등으로 나열할 수 있다. 지역에서 여러 가지 근대문명과 착취구조가 동시에 출몰할 때 양 지역을 이어주는 가장 큰 사건은 아마 ‘철도 위를 달린 시커먼 괴물’ 즉 철도가 아니었을까?

우리에게 기차의 등장은 근대 문명이자 진보의 상징이었고,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지배하는 데 꼭 필요한 시설이었다. 철도가 제국의 상품과 군대가 들어오고 원료와 식량을 수탈해 가는 노릇을 했던 것은 상식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철도를 일본과 만주를 잇는 중간 연결고리로 삼았고, 철도는 도시의 흥망성쇠를 가르는 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철도가 생기며 철도 주변이 발달했고, 행정기능은 철도주변 신도시로 옮겨 갔다. 즉 문명과 수탈이라는 이중주가 울려 퍼지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우리는 ‘경북선’ 철도에 주목하고 있다. 경북선은 경상북도의 서북부지역인 김천~안동 간 118.1km를 연결한 철도노선이다. 조선철도회사에서 1924년 10월1일 김천~상주 간 36km 개통을 시작으로, 같은해 12월25일에 상주~점촌 간 23.8km, 1928년 11월1일 점촌~예천 간 25.5km, 1931년 10월15일에는 예천~안동 간 32.8km가 개통되었다. 산업선으로 상주, 문경, 영주지역의 석탄과 흑연, 중석이 주된 수탈대상이었다고 한다.

경북선의 마지막 구간인 안동~예천 사이에 철도가 개설(1931년 10월15일)되었는데, 예천과 안동 노선의 역명은 예천~고평~호명~경북풍산~명동~경북안동 으로 이어져 있었다. 1940년에 국유화된 후 제2차 세계대전 말기 군수 물자 조달에 쫒겨 1943년에서 1944년까지 점촌~안동 간 58.3km 구간의 선로를 철거했다. 1941년에 경북선은 김천~점촌(59.8km)~안동(118.1km) 구간을 하루 8편 가량 운행했다고 한다.

경북선의 준공으로 생활양식이 많이 바뀌었다. 당장 경북안동역은 종착역이었고, 그 앞에 상권이 형성되었다. 이 안동과 예천사이의 철도 노선은 약 14여 년을 유지하다가 1944년 9월30일 철길은 폐선 되는데, 1942년 4월1일 ‘중앙선’의 건설로 우회 대체 구간이 개통됐고 제2차 세계대전 말미에 전쟁물자의 부족으로 철거된 셈이다.

안동 평화동 등에 건설된 2백여 동의 철도관사는 지금까지도 그 건축의 일부가 상존해 있는 형편이다.

▲ 근대 초 재래시장. (사진제공. 사진으로 떠나는 근대기행, 부산근대역사관)

‘재래시장’의 역할, ‘니껴’형 사투리 독특성

안동과 예천은 지리적으로 연접해 있어 4개 면(面)지역이 서로 맞닿아 있다. 풍천과 지보, 풍산과 호명, 서후와 보문, 북후와 감천이 서로 등을 대거나 몸통을 나누며 경계선을 넘나드는 비슷한 생활권으로 삶을 영위해 왔다.

근대 시기에 안동과 예천지역은 대안으로서 농촌공업의 발전과 같은 특별한 지역적 발전의 전망을 확보할 수 없었다. 그런 가운데 소위 재래시장은 지역경제의 유일한 출로로 인식되어져 나갔다. 재래시장은 조선 전통사회때 부터 유일한 거래의 장이자 거래기관, 지역사회의 사람과 상품(농산물, 특산품 등)이 모이며 흩어졌던 떠들썩한 광장이자 장터이었다.

“… 물맛 좋다 예천장, 양반 많다 풍산장 … 끗발 좋다 구담장 …” 부터 “… 들락날락 내설장 숨가빠서 못 갈네, … 바람 분다 풍기장 어지러버 못 갈네, 한짐 잔뜩 짐천장 무거버도 못 갈네, …술 걸렀다 책거리장 꺼이꺼이 못 갈네 ….” 이 같이 구성지고 애환이 끓는 노랫가락은 오래 전부터 등짐장수와 보부상, 농민들의 입을 통해 옮겨 다니며 흘러 왔을 것이다. 백성 또는 지역주민의 일상 경제생활을 표상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관심을 두고 기억여행 테마로 삼을 만하다. 또한 두 지역 간의 지금의 34호 국도와 그 옛길들, 마을과 마을을 서로 이어주던 오솔길에 대해서도 천착해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두 지역이 공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유무형의 소중한 자산 중 ‘언어’의 독특성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전통사회를 지나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지역정서와 문화를 잘 담아낸 소위 방언(또는 사투리)을 통해 근대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교사인 김정균은《안동방언사전》에서 “옛말의 흔적이 남아있되 특이한 낱말과 많은 된소리, 감탄사의 발달 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전 국민적 인기를 모은 유홍준의《나의문화유산답사기3》, <‘니껴’형 전탑의 고장을 아시나요>편에서 ‘능교’형과 ‘니껴’형의 차이에 대해 재미있는 표현을 선 보였다.

“능교형의 대표 지역은 대구이고 니껴형은 안동을 비롯한 예천, 의성, 영양, 봉화, 영주 등이다. … 어미뿐만 아니라 이른바 성조(聲調)라고 하는 말의 높낮이와 길이에도 차이가 있어서 ‘학교 안 가나’에서 능교형의 대구에서는 ‘안’에 악쎈트가 있지만 니껴형의 안동에서는 ‘가’에 악쎈트가 있다. 이른바 고평평(高平平)과 평고평(平高平)의 차이다”고 서술한다. 이에 두 지역이 지닌 언어 즉 말씨의 독특성을 통한 스토리텔러와 스토리텔링의 답사기행도 흥미로울 것이다.

▲ 안동에 들어온 선교사 일행. (사진제공. 안동의 어제와 오늘, 안동시)

뿌리 깊은 나무의 ‘줄기’, 지역근대 시야를 회복시켜야

전기가 대중화되기 이전 등잔불을 사용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희미한 추억의 불빛으로 남아 있는 호롱불, 남포등이 사용되던 때에 대개 ‘등잔 밑이 어둡다’는 표현을 자주 써 먹곤 했다. 지금 대다수 우리들은 현대인을 자처하며 자동차와 비행기, 인터넷 등 편리한 생활의 최첨단 문명과 문화를 흠뻑 즐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세대 보다 3~4세대를 먼저 살아간 선대(先代)의 근대적 삶에 대해선 너무 무지할 뿐만 아니라 기록적 유산을 찾고 지역과 삶의 정체성을 찾는 노력이 미약한 편이다. 세대적으로 3~4세대를 먼저 살다가 할아버지·할머니들의 삶과 우리 지역사는 소위 중앙집권사회의 역사라는 거대한 파고(波高)에 치이어 수장되어 있고, 지역은 미몽(迷夢)에 빠져 이제는 무관심 속에 완전히 사장(死藏)될 위기에 처해 있다. 너무 멀리, 너무 높게 바라보다 보니 우리의 몸이 나고 자란 지역적 삶과 근대 지역역사에 대한 인식은 얕아지고 시야는 흐릿해져 버렸다.

마치 등잔 밑이 어두워진 형편이다. 자연스럽게 대하는 지역의 다양한 생활양식과 생활토대가 ‘지역’의 그 어느 시간대로부터 출발했는가를 재인식해봐야 할 때이다. 뿌리 없는 나무가 없듯, 뿌리의 시작은 줄기라는 근대와 근현대를 통해 오늘의 새파란 잎새와 꽃잎으로 만개해 왔다는 관점에서 ‘안동~예천 간 근대기행’을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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