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사랑하던 가일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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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사랑하던 가일마을에서...
  • 권기상 기자
  • 승인 2020.10.2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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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일서가(佳日書架) 김현정 대표

「월간 국회도서관」 지난 10월호에 안동시 풍천면 가일마을에서 '가일서가(佳日書架)'라는 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김현정 대표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막난 권오설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글 형식의 글을 게재했다. 권오설 선생은 가일마을에서 태어나 1919년 3・1운동에 연루돼 옥고를 치루고, 1926년 6・10 만세운동을 기획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돼 출소 100일을 앞두고 옥사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선생의 시신조차 확인하지 못했다. 일제가 고문의 흔적을 숨기기 위해 그의 시신이 든 관을 철판으로 밀봉했기 때문이다. 선생은 사후 75년이 지난 2005년에서야 항일투쟁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따라 독립유공자로 서훈됐다. 본지에는 김 대표의 기고로 독자에게 소개된다.<편집자 주>

▲사진 안동축제관광재단 제공.
▲사진 안동축제관광재단 제공.

아마도 이 편지는 당신에게 보내는 처음이자 마지막 인사가 될 것 같습니다. 한 번쯤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습니다. 100년 전 이 자리에 있었을 당신에게요.  

당신의 마을에 책방을 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고향을 떠나기 전 머물렀던 ‘노동재사’에서 작은 책방을 운영하고 있답니다. 기억하시지요? 당신이 1919년 3∙1운동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원흥학술강습소’를 세웠던 바로 그 곳 말입니다. 그 때 당신은 겨우 스물 두 살 이었다고 하더군요. 부끄럽게도 저는 작년에서야 처음으로 당신의 이름 ‘권오설’과 당신의 이야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 곳 가일마을이 ‘안동의 모스크바’로 불린다는 사실과 함께 말이지요. 

이 마을을 처음 만났을 때, 남편과 저는 이 곳에 흠뻑 빠졌답니다. 마을초입에 자리잡은 500년 수령의 커다란 회화나무, 마을로 올라서면 만나게 되는 아담한 저수지, 정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나지막하게 지어진 기와집들은 그야말로 그림이었습니다. 사실, 당신이 살던 그 시절과 지금은 아주 많이 달라져서 ‘마을’이라고 부를만한 곳이 흔하지 않답니다. 제 짧은 생각이지만 당신이 살았던 이 마을은 여전히 ‘마을’의 모습을 지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신이 살던 그 시절에도 여전했을 나무들은 아름드리 잘 자라고 있고, 종가집을 비롯한 고택들에는 여전히 당신의 후손들이 서로 오가고 도우며 살고 있으니까요.

▲사진 가일서가 제공.
▲사진 가일서가 제공.

책방의 이름은 [가일서가 佳日書架]랍니다. 당신이 늘 그리워했을 마을의 이름인 ‘아름다울 佳’, ‘날 日’ 자를 그대로 따서 지었습니다. 남편과 제가 이 곳에 책방을 열었던 작년 가을은 당신이 이 곳에 돌아왔던 때로부터 딱 100년이 흐른 후 였더군요. 지난 여름, 당신이 청년들을 모아 나라의 독립을 열망하며 보냈던 이 곳을 저의 남편이 직접 고치고 다듬었습니다. 오랫동안 비어있던 한옥을 고치는 일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감기도 잘 앓지 않았던 저의 남편은 이 곳을 고치는 3개월 동안 3번 쓰러졌으니까요. 아 참, 저의 남편은 당신이 여기 머물렀단 사실을 알고부터는 스스로를 ‘돌쇠’라 불러달라고 하더군요. 이 곳을 쓸고 닦고 고치고 다듬는 자신의 노동이 당신에게 드릴 수 있는 자신만의 인사라고요. 물론, 당신의 희생에 비하면 너무나 보잘 것 없지만요. 자연을 벗하여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책방입니다. 

책방에 대해 궁금하실 것 같네요. 책방에서는 책을 팔고 있습니다. 큰 방에 책장을 짜 넣었습니다. 너무 오래된 한옥이라 일반 가구를 넣을 상황이 되지 않아 직접 나무를 잘라 맞춤형 책장을 만들었지요. 그러다보니 요즘 가구들처럼 매끈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책을 올려두기엔 적당합니다. 책은 늘 100권 정도만 채워둡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새로운 책이 들어와 인연을 기다린답니다. 가능한 다양한 책들을 선별해서 넣으려 하지만 결국은 제 마음이 끌리는 책들만 서가에 올려두게 되네요. 이 부분은 책방주인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자 기쁨이라고 변명하고 싶습니다. 

▲사진 안동축제관광재단 제공.
▲사진 안동축제관광재단 제공.

당신은 잘 모르겠지만, 요즘은 인터넷이라는 것으로 책을 주문하면 어느 곳이든 하루 만에  배송이 되는 시대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골의 작은 책방에 찾아와 책을 구매하는 고마운 이들에게 어떤 책들을 추천하면 좋을 지 늘 고민한답니다. 가장 우선인 조건은 오래 곁에 두고 읽으면 좋을 책,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도 좋은 책, 누구나 한 번은 읽어봤으면 하는 책들이랍니다. 시골마을 책방을 찾은 손님들이 이 곳을 기억할 수 있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일상이나 대안적 삶에 대한 책들도 빠트리지 않고 준비하고요.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봐도 좋을 그림책, 그리고 안동과 예천 등 가까운 지역 출신 작가들의 책도 한 두 권은 꼭 챙겨 올려둡니다. 아마 당신이 읽었을 수도 있는 오래된 고전들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당신이 보기엔 이게 무슨 책인가 싶을 요즘 책들도 있을 겁니다. 이 작고 아담한 책방 안에 앉아 창을 열면 당신이 마을청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던 공간인 ‘노동서사’가 창틀액자 속 그림처럼 펼쳐진답니다. 책을 고르다 보면 누구나 저절로 눈길이 머물러 숨을 고르게 되는 곳이지요.

책방에서는 글을 쓰기도 합니다. 가능하다면 매년 글을 모아 책을 내려고 해요. 눈치 채셨을지 모르겠지만 책방 이름 앞에 ‘글쓰는 책방’ 이라는 덧글을 단 이유지요.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로 글을 써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요. 마을에 들어와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영화 같지 않은 삶이 없더군요. 이 곳의 주민분들(당신에게는 후손들이겠지요)은 대부분 70~80대랍니다. 다들 전쟁을 겪었고, 가난을 이겨낸 분들이지요. 누구에게나 남길 만한 자신의 역사가 있다고 생각해요. 아쉬운 일이지만, 사실 당신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히 남아있지는 않답니다.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가 주고받은 편지들을 이어 붙여 당신의 삶이 얼마나 고되고 힘들었을지 가늠해볼 뿐이랍니다. 당신 삶에 대한 글이 남겨져 있었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늘 한답니다. 

▲사진 가일서가 제공.
▲사진 가일서가 제공.

작년에는 6세에서 10세까지의 아이들 6명과 처음으로 <나를쓰다>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당신과 마을의 청년들이 혁명과 독립을 논하던 그 방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글을 썼답니다. 아이들은 이 곳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250년이 넘었다는 오래된 집, 온도조절이 안되어 뜨거웠던 구들장바닥, 방 안에 있어도 코가 시린 초겨울 추위를 기억하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과 공유한 공간에서 글을 쓴 이 시간이 아이들에게 충분히 가치있는 경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당신도 몇 십 년 만에 이 곳에 울려 퍼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싫지 않았을 거라 믿고요. 올해에는 중학생 아이들과도 함께 글을 썼답니다. <색: 나는 어떤 색일까요>라는 책이랍니다. 아이들이 자신에 대해 쓰고 제목도 직접 붙이고 표지디자인도 함께 골랐지요. 책들은 모두 책방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성인들과도 함께 책을 낼 계획으로 작은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있는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들을 책에 담아내려고 합니다. 

당신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어떤 곳인가요
저는 공간과 사람도 인연이 있다고 믿어요. 이 공간이 100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당신과 내가 만날 수 있도록 했다는 건 분명 운명이겠지요. 당신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이 곳까지 철관 속에 누운 채 돌아온 지 90년이 지났습니다. 당신은 지금의 나보다도 훨씬 어린 서른 셋에 세상을 떠났더군요. 이런 소식을 전해서 미안하지만, 우리나라는 당신이 그토록 그리던 독립은 했지만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했답니다. 사회주의 이념을 따르던 당신의 동생들과 마을의 청년들이 모두 북한으로 가버렸으니 당신의 이야기를 전할 사람이 없었던 것도 당연한 것 같네요. 당신이 목이 터져라 외쳤을 모두가 배곯지 않는 나라도 아직은 완벽하게 이루지 못했답니다. 지금도 끼니를 굶고 있는 아이들이 있다는 기사가 나오는 걸 보면요. 당신이 꿈꾸던 유토피아는 언제쯤 이루어질까요. 

▲사진 안동축제관광재단 제공.
▲사진 안동축제관광재단 제공.

안타깝게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습니다. 그저 이 공간을 드나드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바라던 소박하고 당연한 꿈이 전해지길 바라며 이 곳을 지켜가는 것 뿐이겠지요. 이 공간에서만큼은 자연을 돌아보고 이치를 들여다보고, 서로를 돌아보며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기를 바라면서요. 

당신이 보기에 이 곳이 아주 흡족한 책방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책방주인이라고 하기에 남편과 저는 여전히 미숙하고 서툴기도 하고요. 하지만 응원해주세요. 제게 주어진 시간만큼은 이 공간에서 당신의 뜻을 기억하고 이 곳에 오는 이들과 나눌 수 있도록 할게요.  
부디 그 곳에서는 자유롭고 평온히 지내세요. 

2020년 9월
김현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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