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동물 공존과 공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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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 공존과 공생
  • 오경숙 기자
  • 승인 2012.10.22 17: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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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휘동 기고문

▲ 김휘동
나는 두메산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한때 농사를 지으며 청년기를 보냈다. 집 앞으로 굽이굽이 흐르는 맑은 시내와 병풍처럼 휘둘러 친 푸른 산, 기기묘묘한 바위의 모습들은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으로서 시골에서 흔하게 접해왔던 산수화였다.

30여 호의 자그마한 가옥들은 주변 자연 경관의 질서에 순응 하는듯한 정겨운 마을이었다. 대부분 집이 초가로 특별하게 다듬은 정원이나 정원수도 없이 집주변에서부터 마을전체가 하나의 자연과수원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동네였다.

집 앞 오른쪽은 살구나무, 왼쪽은 석류, 그 옆에는 살구, 자두나무, 감나무, 그리고 집 뒤로 모과와 대추나무, 산기슭에는 밤, 호두, 은행나무…… 집집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그것은 50~60년대의 평범한 시골의 모습이기도 했다.

전통마을 속 산비탈의 자연 같은 집에서 소, 개, 고양이, 닭, 염소, 토끼, 쥐, 까치와 같은 동물들과 함께 어울려 생활하던 시절을 회상 해 보았다, 물론 오늘날의 농촌 풍경과는 너무 멀어진 모습이기도 하지만……

먼저 음식물 찌꺼기와 하수 물을 말끔히 삼켜 주던 의리의 소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가 밥을 지어먹는 부엌과 소가 생활하는 마구간의 대부분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생활해 왔다. 사람이 먹고 마시고 남은 음식물 찌끼와 설거지를 하고난 후의 구정물에다가 짚이나 콩깍지, 쌀겨 등 알곡을 거둬들인 후 남은 부산물을 혼합하여 푹 끓여 놓은 것이 소의 양식인 쇠죽이다.

다른 한편 소가 배설한 오줌과 똥을 마당 모퉁이에 풀잎 거름과 함께 쌓아 두면 그것이 썩어 특유의 열을 동반한 메탄가스가 발생해서 쉽게 부식함으로써 농작물의 자양분인 퇴비(거름)를 만들어 주었다.

경운기에 해당하는 농기계의 동력 수단으로 그 당시는 소가 그 역할을 도맡아 했다. 그것은 바로 사람과 소가 함께 농경사회를 구성하는 요체이기도 했다.

당시에는 전체 인구의 80%가 농업에 종사했고 농촌에서 소를 팔아야 학교를 보낼 수 있었기에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 불렸으며 자녀들의 혼사 준비도 소에 의존 할 수밖에 없는 실정으로서 소는 동산 중에서는 가장 값나가는 재산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들판에 풀어놓았던 소가 어둠을 등에 지고 꾸벅꾸벅 자기 집이라고 찾아오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결국 소는 인간에 의해 살아가고 인간 또한 소에 의지해 살아가는 즉 동물과 사람이 공존하는 전형적인 삶의 모습 그 자체였다.

다음은 빈 집을 지키며 주인에게 맹종하는 충직한 개(犬)에 대해서다.

개는 사람이 제공해주는 음식물이 있어야 그 삶이 가능하고 홀로 자구노력으로 먹이를 해결 할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는 동물이다. 그렇기에 개는 자신에게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주인의 생명을 지키려 하며 주인의 사랑을 받기 위하여 가지가지 재롱과 애교를 부린다.

심지어 갓난 애기가 똥을 누면 개를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면 개는 기꺼이 그 똥을 더럽다 하지 않고 말끔히 먹어치우는데 그것은 농촌사회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때로 깊은 산속에서 실종된 사람을 찾을 때 개를 풀어놓기도 하는데 험준한 산위 아래위를 오르내리며 뛰어다니는 충성스러운 모습은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좋은 음식물을 얻기 위함도 아닌 주인이 주는 애정의 표시인 ‘빈 공’을 입에 물려주는 사랑을 얻기 위함이다. 주인이 술을 마시고 추운 겨울 길가에 쓰러져 깊이 잠들었을 때 개가 몸을 감싸고 체온을 유지시키며 이상한 울음소리로 타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 주인의 생명을 구했다는 것은 보편적인 이야기가 되고 있다.

세상에는 애완견의 재롱에 푹 빠져 개와 함께 잠자리를 같이하는 분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그 중에는 애지중지하던 개가 죽어 우울증에 걸리거나 자살하는 아이들도 있다고 하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있다.

동물 중에서 개의 육질은 사람의 체질과 거의 비슷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 병후 원기 회복을 위해서 어김없이 개고기나 개소주가 등장한다. 물론 보는 동물 애호가들의 날카로운 비판의 목소리가 있기도 하지만 어쨌든 무더위에 지쳤을 때 보신탕이 가장 선호하는 보양식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결국 오랜 기간 동안 개는 인간에 의존해 살아왔으며 사람 또한 개에 의존해서 살아가는 생명 공동체의 한 모습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세 번째로는 집 주변의 잔해를 말끔히 없애주고 밤 시간을 알려 주는 닭에 대해서이다.

닭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구석구석 집 주변에 흩어진 곡식알과 마당에 버려진 음식물 찌꺼기를 주워 먹는다. 미물의 벌레도 잡아먹고 돋아나는 어린 풀잎으로 배를 채우며 집 주변 의 잔재들을 말끔히 없애주는 빗자루 역할을 해 주었다.

또 시계가 없던 그 시절 농촌의 고정된 새벽시간에 ‘꼬끼오’ 유창한 닭의 울음소리는 밤의 적막을 깨트리며 곤한 잠을 깨워주는 기상 나팔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또한 닭의 알(계란)은 인간이 가장 선호하는 영양식품이다.

삼복더위에 빼놓을 수 없는 삼계탕과 닭백숙, 안동의 대표 브랜드인 찜닭, 춘천의 닭갈비를 비롯해 각 지역마다 갖가지 닭 요리가 있다.

닭은 마지막 몸까지 인간을 위한 봉사를 하게 된다. 그 반면 닭 또한 인간이 보호해 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먹잇감을 노리는 하늘의 매와 독수리, 닭의 천적인 족제비가 항상 주변을 맴돌고 있으나 이를 지켜주는 든든한 주인의 보살핌이 있어 평화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으니 이 또한 서로간의 생명 공동체의 전형이라 할 수 있겠다.

네 번째로 겨울철 귀와 목의 보온을 유지 해주는 지혜로운 토끼가 있다.

언제 보아도 천진난만한 천사 같은 모습으로 어린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동물의 하나가 토끼이다.

내가 중학교 일 학년 때였다. 방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아카시아 잎이나 칡잎 또는 클로버 잎을 비롯한 풀잎을 뜯어서 토끼에게 먹이는 일이었다. 아삭아삭 빠른 입놀림으로 먹이를 먹는 하얀 토끼는 아무리 쓰다듬어도 싫증나지 않는 재롱둥이였다.

요사이는 다소 뜸해졌으나 한 때는 토끼 고기가 유행처럼 선호되던 시절도 있었다. 그리고 특히 추운 겨울날 토끼털로 만들어진 귀마개와 보온 목도리로 토끼털을 즐겨 사용하던 어릴적 전형적인 시골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다섯 번째, 인간에게 유비무환의 정신을 일깨우며 생체실험에 헌신하는 쥐.

쥐는 인간이 마련한 식량과 음식을 훔쳐 먹는 해로운 동물로 분류된다. 민첩한 행동으로 곡식창고나 뒤주를 뚫고 들어가 장독이나 부엌을 비롯하여 먹을거리를 찾아 종횡무진 집안 구석구석 숨어 뒤지고 다닌다.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던 60년대, 재빠른 쥐를 잡기위해 인간들은 사전 완벽한 대비를 했을 뿐 아니라 쥐를 퇴치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는 지혜를 짜내기도 했다. 범국민 쥐잡기 날이 있었는가 하면 초등학교 아이들에게 쥐꼬리를 잘라가지고 가서 잡은 쥐의 마릿수를 확인받던 곤혹스러운 숙제도 주어졌었다.

그러나 쥐는 인간과 가장 유사한 생체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각종 생약과 백신 발견을 위한 인간 대용 실험으로 쥐가 활용되고 있다. 그 반면 쥐는 인간으로부터 먹이를 얻고 인간 대신 생명의 실험 대상이 되니 그렇게 보면 쥐 또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운명적 존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여섯 번째, 인간의 식량 창고를 지켜 주는 고양이에 대해서다.

농경사회에서 식량 창고를 지키는 일이야 말로 생명을 지켜주는 첫 번째 과제라 할 수 있다. 쥐는 가장 번식력이 강하고 또한 민첩하다. 그 활동을 제어하면서 박멸시키는 천적으로 고양이가 가장 제격이었다.

사람들은 고양이를 이용해 쥐 사냥에 적극 임하라고 고양이와 함께 생활했다. 쓰다듬어 주는 등 온갖 애정 표현으로 쥐잡기를 촉구했고 쥐 사냥이 부족할 때에도 고양이의 연명을 위해 음식물을 보충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주거의 선호도가 단독주택에서 아파트로 변하고 농촌 또한 완벽한 용기로 식량을 보관하게 됨으로써 고양이는 집밖으로 쫓겨나 골목과 들판을 헤매는 도둑고양이로 전락했다. 이로 인해 생태계를 파괴하는 새로운 주범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니 인간과 공생해야 하는 새로운 생명 공동체의 붕괴가 어떤 문제점을 나타내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일곱 번째, 봄과 가을을 알려주는 계절의 메신저 제비.

따사로운 햇볕이 내려쬐는 음력 3월3일 삼짇날이 되면 지난해 강남으로 떠나갔던 제비가 봄소식을 안고 돌아온다. 행여 제비가 돌아오지 않을까 조바심으로 제비집을 지켜보던 것이 우리네 순박한 삶의 모습이었다.

마루 위나 천정, 벽, 문지방 위 또는 추녀 끝 어디이든 제비가 마음에 드는 곳을 골라 집을 지으면 온 가족이 모두 경사스러운 징조로 보고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보호하기도 했다.

수시로 배설하는 제비 똥이 마루나 처마를 오염시켜도 어느 누구하나 제비를 불안하게 하거나 책망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제비 새끼가 떨어지지 않도록 제비집에 보조 받침대를 마련해 주기도 했다.

가을이 되어 새끼와 함께 전 가족이 강남으로 떠날 때는 모두가 이별의 서운함을 애써 감추고 다음해 꼭 다시 돌아와 주기를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동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한 가정의 진면목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여덟 번째 인간 주변에서 서식 하면서 새 소식을 전해 주는 까치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신기하게도 인가와 멀리 떨어진 산골짜기나 울창한 산림 속에서는 까치집을 볼 수가 없다. 대게 사람이 사는 집 주변의 과수나무나 가로수 또는 전신주 변압기 주변이나 심지어 아파트 위성안테나에다 집을 짓기도 한다. 까치집을 뜯어내면 또 짓고, 뜯어내면 다시 짓기를 7~8회 반복하기도 하여 한전에서는 변압기 보호를 위해 ‘까치와 전쟁’을 선포하기도 했다.

까치는 인가 주변에 버려진 나무 가지와 심지어 철사 줄, 망가진 TV 안테나를 비롯해서 우리네 살림살이의 버려진 폐자재를 활용해 자신들의 집을 짓는다. 이런 것을 보면 까치는 인간과 떨어져 살아가지 않으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까치는 까치집 밑바닥을 진흙으로 바른 후 봄철 털갈이 하는 소 등의 털을 뽑아서 깔아 놓은 후 알을 놓아 새로 태어나는 새끼의 보금자리를 만들고 있다.

예로부터 까치가 짖으면 ‘기쁜 소식이나 반가운 손님이 온다.’라는 속담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까치의 예지와 정보력은 놀랄 정도로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우체배달부가 동리 입구에 들어서면 자식이 군대에 가 있는 집이나 편지왕래가 잦은 집을 찾아가서 집주변을 맴돌며 짖어댄다고 한다.

까치가 특별하게 싫어하는 천적은 뱀이다. 뱀은 까치 알과 까치 새끼를 노리고 있기 때문에 집 주변에 뱀이 나타나면 주변의 까치가 집단으로 몰려와 울부짖으며 일제히 뱀 눈을 공격하기 때문에 뱀이 스스로 도망간다. 이는 궁극적으로 우리 인간을 뱀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경비 역할을 까치가 대신 해주고 있으니 이 또한 까치와 인간이 함께 살아가야하는 공동체의 필연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온갖 문명의 이기가 넘쳐나는 오늘은 인간은 인간대로 아파트 등 닫힌 공간을 지향하고 소와 같은 동물이 해내던 노동력과 같은 일은 기계가 대신하고 있다.

집집마다 키워 왔던 개나 고양이는 소수 동물 애호가들에 의해서만 키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은 사람은 사람대로 살아가고 동물은 애완용이나 식용을 위해서, 결국 공생이 아닌 ‘사육’의 의미로 전락하고 만 셈이다. 또한 제비나 까치는 이제는 인간과 무관한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지금은 모든 것이 부족함이 없이 풍요로워진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동물이 함께 정서를 공유하고 가족처럼 공존 공생하며 살아왔던 지난 시절이, 궁핍했지만 오히려 더 인간과 동물이 한 시대를 동행해 왔던 아름답고 바람직한 시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2012년 3월 23일 늦은 밤
솔 바위 김 휘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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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두 2012-10-22 21:54:54
귀거래사를 논하지 않더라도 지난 시간들에 대한 연민과 상념도
적지 않았을터인데...
모든것들 내려놓고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하심은 보기에 너무
좋습니다.
이는 분명 많은 이들에게 교훈적.스승적 본보기가 될 것 입니다.
존경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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